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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택시운전사"의 실제 주인공 김사복과 힌츠 페터
영화 "택시운전사"는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영화이다.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열흘 동안 신군부 세력에 비상계엄이 시행되고 이에 항거하기 위해 일반 시민들이 거리로 나왔다. 신군부는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거리로 나온 시민들을 폭력으로 제압하여 수많은 시민이 희생된 비극적인 역사가 그 배경이다. 이 비극적인 역사 속에서 택시 운전사 김사복과 독일의 언론인 힌츠페터가 우연히 만나게 된다. 김사복은 거금을 벌거라는 단순한 생각이었지만 역사의 소용돌이의 한가운데 있게 된다. 신군부는 광주를 고립시키고 언론을 통제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이 두 분의 공로로 지금 우리는 제대로 된 역사를 기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김사복 님은 광주 사건 이후 정신적 충격이 크셨는지 4년 뒤인 1984년 12월 세상을 떠나신 것으로 알려진다. 그리고 언론인의 사명감으로 광주 깊숙이 들어 가신 독일인 기자 위르겐 힌츠 페터는 대한민국 민주화에 기여한 공로로 2003년 제2회 송건호 언론상을 받게 된다. 그리고 상을 받은 후 했던 수상 소감이 실린 한 줄의 기사가 이 영화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 진실을 전하겠다는 기자의 사명감과 택시운전사 김사복과 자신을 도와준 광주 젊은이들의 헌신에 감사한다는 소감이었다. 그리고 2016년 1월 향년 78세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영화 "택시운전사"가 개봉되기 1여 년 전에 돌아가셨다. 공주 항쟁 이후 두 분은 다시 만나지는 못했다고 알려진다. 광주 항쟁이 역사로 인정받고, 이렇게 영화로까지 만들어진 것을 아신다면 무척이나 흐뭇해하실 것 같다.
영화 "택시운전사' 1980년 5월 광주에서 벌어진 일
아내가 병에 걸리면서 가진 돈을 다 쓰고 택시 운전사로 생계를 꾸리며 살고 있는 만섭은 유일한 가족인 딸을 위해 궁상맞게 돈을 모으고 있다. 밀린 월세로 고민하던 만섭에게 돈 벌 기회가 생긴다. 외국 손님을 태우고 광주까지 다녀오면 거금 10만 원을 준다는 말에 손님을 태우고 신나서 광주로 길을 나선다. 10만 원이면 밀린 월세를 해결할 수 있는 돈이었다. 그런데 만섭의 택시 말고는 그 어떤 차도 볼 수 없었다. 만섭은 뭔지 모를 불안감이 들었다. 그런데 광주로 가는 길이 다 막혀 있고 도로에서 군인들과 마주치면서, 만섭은 택시를 서울로 돌린다. 불안함이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러나 광주로 가지 않으면 돈을 주지 않겠다는 피터의 말 때문에 할 수 없이 샛길까지 찾아가며 광주로 향한다. 광주에 도착하고 차가 고장 나서 하룻밤을 묵게 되면서 1980년 5월 그곳 광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혹한 현실을 목격하게 된다. 군인들은 무장도 전혀 하지 않고, 특별한 행동도 하지 않은 민간인들을 무자비하게 때렸다. 그렇지만 시민들은 도망치지 않고 시위를 멈추지 않았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쓰러졌고, 광주의 택시운전사들은 정신없이 환자들을 병원으로 옮기느라 바빴다. 피터는 이러한 광주의 모습을 전부 담고 있다. 본인도 외신기자라서 이런 촬영은 너무나 위험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랑 곳 하지 않고 광주의 참상을 담아냈다. 몇 번 들키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만섭의 택시를 타고 도망칠 수 있었다.
영화 "택시운전사" 아무도 몰랐을 비극적인 역사
성인이 되어서 겨우 알게 된 비극의 역사 광주. 그런데 상황을 제대로 알게 된 건 그로부터 더 이후였다. 광주에 우리는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당시에 광주는 고립이 되어 있었고, 언론은 통제되어 있었고, 인터넷도 없던 시대라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푸른 눈의 목격자"로 불렸던 힌츠 페터의 목숨을 걸로 지켜낸 광주 민주화 운동의 촬영물이 아니었다면 영원히 묵힐 수도 있었다. 힌츠 페터는 죽으면 광주에 묻어 달라고 하여 기념재단에 머리카락과 손톱 일부를 남기기도 하였다고 한다. 또한 1986년 서울 광화문 시위 현장에서 경찰에 맞아 목과 척추에 중상을 입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민주주의 현장에는 늘 함께 하였던 고마운 분이셨다. 힌츠 페터의 고귀한 헌신으로 우리는 5.18을 절대로 절대로 잊으면 안 되는 이유가 한 가지 더 생긴 것 같다.